1987년의 유산과 2026년의 현실

<글쓴이 강민형> 산업노동사회학과 정치사회학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재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자본주의에서 불안정 노동의 확산과 노동시장 불평등 심화, 노동운동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최근 저서> 『포스트 성장시대와 노동의 미래』(공저, 한울, 2025) <최근 논문> “이중화 시대 작업장 민주주의의 재구성”(『한국사회』, 2025)

노동정치의 시각에서 바라본
삼성전자 파업과 지방선거

삼성전자 총파업이 던진 충격

2026년 상반기 한국 사회를 뒤흔든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적 사건은 단연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총파업 선언이다. 삼성전자의 2026년 1분기 영업 이익이 57조 2천억 원으로 발표된 지난 4월 7일, 삼성전자 초기업노조는 실적에 걸맞은 성과급을 요구했다. 이어 4월 23일에는 ‘성과급 상한제 폐지’를 요구하며 4만 명 규모의 대규모 집회를 성사시켰다. 이날의 총파업 선언부터 5월 20일 노동부 장관 주재로 노사합의가 이루어져 파업이 유보되기까지 약 한 달 동안, 한국 사회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부, 언론, 재계는 물론 노동계와 시민사회까지 합세하여 삼성전자 노조의 실리조합주의 노동운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반도체 산업의 막대한 초과 이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반도체 산업의 호황과 새로운 작업장 교섭력의 부상

글로벌 AI 붐이 추동한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AI 설비투자의 핵심인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DRAM을 생산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21세기 노동 소요의 새로운 진앙지가 되었다. 1970년대 단순 기판 조립을 담당하던 하청업체에서 출발한 한국의 반도체 기업은, 1990년대 이후 설계·웨이퍼 제작·연구개발(R&D)·공정 조율 등 고부가가치 사업을 주도하는 선도기업으로 탈바꿈했다.

2010년대 이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글로벌 양강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최근 AI 전환에 따른 전례 없는 반도체 슈퍼 사이클로 인해 막대한 매출과 수익을 거두고 있다. 한국의 국내 총생산(GDP)의 약 7%, 전체 수출의 약 25%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의 위상만큼이나 이곳의 노동자들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며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쥐게 되었다.

이는 2020년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무노조 경영 종식 선언과 맞물려 새로운 노조운동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마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비공인 파업을 통해 조직된 민주노조의 전투적 저항을 1946년 총파업 이후 처음으로 한국 사회가 목도했을 때처럼, 우리는 기성 노조 정상조직의 통제를 벗어난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의 출현을 예기치 않게 마주하고 있다.

삼성전자 노조운동의 가능성과 한계

이번 파업 시도는 21세기 한국 노동운동이 지닌 가능성과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한국의 수출 대기업 노동자들이 가진 구조적 힘은, 글로벌 자본주의에 깊이 통합된 21세기 한국 경제에서도 여전히 아래로부터의 노동운동이 역동적으로 부상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은 불황기에는 임금 동결 등으로 고통을 분담했으나, 호황기의 수익이 투명하게 공유되지 않는 부당함에 맞서 투쟁을 조직해 냈다. 이는 미국의 빅테크 산업 노동자나 한국의 IT산업 개발자의 노동운동과 마찬가지로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의 고소득 국가 선도산업 내부에서 분출한 저항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3~40년 전의 연대 지향적 민주노조운동과 달리, 삼성전자 노조운동은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미시조합주의적 타협과 조합원 이익 극대화에 머무르고 있다. 공급망 내 하청·종속회사 노동자들은 연대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이들과의 이익 공유 역시 파업의 명분이나 목표가 되지 못했다. 삼성전자 노동자 파업이 반도체 산업 전체의 노동운동을 견인하지 못하는 한계가 명확하다.

무엇보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이번 파업 조직 과정에서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은 뼈아프다. 이는 향후 삼성전자 노조운동이 전략적 위치를 활용해 대기업 정규직의 실리조합주의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과거 반올림 운동에서 시작한 삼성전자 노동운동의 사회운동적 노조운동의 유산이 약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민주진보 연합 정치의 늪과 진보정치의 위기

삼성전자 파업이 유보된 지 약 2주일 뒤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지향해 온 두 가지 핵심 목표, 즉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계급적 산별노조 건설’이 단시일 내에 실현되기 어렵다는 냉혹한 현실을 재확인해 주었다.

민주당의 광역지자체 선거 승리와 진보당의 선거 연합 전략은 201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민주-진보 연합 정치’와 ‘빅텐트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안타깝게도 민주노총 내 일부 지도부와 활동가들은 진보정당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민주당 정치인들과 상층에서 정치적 거래를 통해 자리를 도모하는 세력과 긴밀히 얽혀 있다. 이들은 노조를 ‘투쟁 공동체’가 아닌 ‘이익집단’으로 바라보며, 내란 종식을 명분으로 민주당과 연대하는 것이 불평등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 다소 안일하게 기대한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민주당을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항 운동으로 견인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당에 종속되어 끌려다니고 있다. 최근 연구들이 지적하듯, 노동자 계급과 중간계급의 동맹에 기반했던 2000년대 한국 진보정당의 지지 기반은 단일화, 야권연대, 선거연합을 거치며 오히려 완전히 와해되었다. 결과적으로 진보정당은 사회정책을 선도하던 유능함을 잃고 민주당의 하위 파트너인 위성정당으로 전락했다. 일반 유권자의 시각에서 한국의 진보정당은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상실하였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한 것은 아파트 자산 가치 상승을 바라는 중·상층의 계급적 선택인 동시에, 자산 금융화와 양극화, 불평등 문제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민주당에 실망한 불안정 노동자와 서민, 청년층의 불만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기로에 선 노동운동: 새로운 계급정치를 향해

보수화되는 도시 중산층과 청년세대, 그리고 실리주의 경향이 강해지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라는 현실 앞에서, 오늘날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더 이상 ‘민주-진보 연합’이라는 빅텐트에 안주하며 보수화되는 대중을 민주당과 한목소리로 비난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포퓰리즘이라는 허리케인이 되어 지금은 튼튼해 보이는 빅텐트를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 우파 포퓰리즘이 양극화와 불평등의 대안이 되지 않도록, 현장에서부터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구축해야 한다.

2026년 상반기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는 명확하다.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으로 부상한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파업은 노동자 저항의 역동성을 증명했으나,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실리주의와 민주노조운동의 고립이라는 숙제를 안겼다. 아울러 지방선거 결과는 민주당에 종속된 상층 연합 정치가 진보정당의 계급적 기반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제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대기업 정규직의 실리조합주의를 넘어 미조직·불안정 노동자들을 주체로 세우는 조직화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이들의 계급적 이익을 능동적으로 정의하고 불평등과 배제에 맞선 사회정의 투쟁의 선두에 설 때만이, 우리는 늪에 빠진 노동정치와 계급정치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