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023년 말 이후 공식화한 이른바 ‘적대적 두 국가론’은 남북관계의 일시적 경색이나 대남정책의 전술적 조정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통일을 국가전략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하고 남북관계를 하나의 민족공동체 내부에서 형성된 특수관계로 규정해 온 기존 노선에서 벗어나 북한의 장기 존속과 체제안보를 중심으로 국가정체성, 대남전략, 핵전략 나아가 한반도 질서에 대한 인식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전략적 전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적대적 두 국가론’은 대남 정책의 부분적 수정이 아니라 북한이 자신의 국가목표와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재정의하는 구조적 변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북한의 공식담론에서 남북한은 하나의 민족공동체에 속한 두 정치체로 규정되었다. 분단은 통일을 향한 과도적・잠정적 상태로 이해되었으며, 북한 자신은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민족적・정치적 정통성을 자임하였다. 이러한 인식 아래 남한은 군사적・이념적 경쟁 상대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혁명, 민족공조 또는 연방제 통일을 통해 하나의 정치공동체로 통합되어야 할 상대였다. 따라서 북한의 대남 정책은 경쟁과 대립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 궁극적 지향점은 민족공동체의 회복과 통일국가의 실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적대적 두 국가론’은 이러한 통일지향적 민족담론의 기본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북한은 더 이상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의 특수관계로 인정하지 않으며, 남북한을 서로 다른 주권・영토・정치체제・국가정체성을 가진 두 개의 독립된 국가로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남한은 더 이상 동일한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이나 통일의 상대가 아니라, 북한의 주권과 체제생존을 위협하는 독립된 적대국가로 재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의미는 단순히 통일정책의 폐기에 그치지 않는다. 북한은 통일의 목표와 민족공동체의 범위는 물론, 국가의 영토와 국민에 대한 개념, 남한에 대한 위협 인식, 핵무력의 전략적 역할, 남북관계의 성격을 하나의 새로운 국가전략 속에서 체계적으로 재배열하고 있다. 즉 통일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기존의 국가 서사를 해체하는 동시에 ‘북한 국가’의 독자성과 영속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 서사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대적 두 국가론’은 단순한 대남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북한의 국가목표가 한반도 전체의 통일에서 북한 국가의 영속적 생존과 체제안보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략적 전환은 국가정체성의 재구성과 대남・대외전략의 재편을 동시에 수반하며, 북한이 스스로의 국가정당성과 체제 지속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하려는 정치적 프로젝트로 평가할 수 있다.
‘적대적 두 국가론’의 형성과 전략적 전환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2023년 말 갑작스럽게 등장한 정책이 아니다. 이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2019.2), 정면돌파전 선언(2019.12),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2020.6), 대남 대적사업 전환(2020.6), ‘명백한 적’ 선언(2022.12) 등을 거치면서 기존의 대남정책과 통일담론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진적으로 축적되고, 이러한 인식이 국가정책과 제도, 나아가 국가정체성의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형성된 전략적 전환의 결과이다. 이러한 변화는 문제의식의 축적, ‘적대적 두 국가관계’의 공식화, 국가노선으로의 발전, 관련 제도와 조직의 재편, 헌법적 제도화, 국가정체성의 재구성이라는 일련의 단계적 과정을 거쳐 추진되었다.
기존 통일정책에 대한 북한의 문제의식은 2023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을 체제 변화를 전제로 한 흡수통일 전략으로 규정하는 한편, 한미연합훈련의 상시화와 한미일 안보협력의 심화를 국가안전과 체제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2022년 핵무력정책 법제화 이후에는 핵무력을 국가방위와 체제안보의 핵심 수단으로 위치시키는 논리를 더욱 발전시켰다. 비록 이 시기에는 ‘두 국가론’이나 ‘적대적 두 국가관계’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북한의 대남담론에서는 남북관계의 기존 전제와 통일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는 인식이 점차 뚜렷해졌다. 남한은 더 이상 통일과 민족공조의 상대라기보다 미국의 대북 압박과 군사전략에 결합된 직접적인 안보위협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기존 통일정책의 효용과 남북관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따라서 2023년 상반기는 기존 통일노선을 즉각 폐기한 시점이라기보다 이후 정책 전환을 준비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문제의식이 축적된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축적된 문제의식은 2023년 12월 노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공식적인 국가담론으로 전환되었다. 김정은은 이 회의에서 남북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가 아니며, 대한민국은 북한에 가장 적대적인 국가라고 규정하면서 기존 통일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와 대남기구의 정비를 지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적대적 두 국가관계’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공식 제시되었으며, 이는 남북관계의 기본 성격을 새롭게 규정한 전환점이었다. 과거 북한은 남한을 군사적·이념적 경쟁의 대상이면서도 동일한 민족공동체에 속한 통일의 상대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적대적 두 국가관계’는 남한을 민족공동체 내부의 상대가 아니라 북한과 구별되는 외부의 주권국가이자 적대국으로 재규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의 대남정책은 통일과 민족공조를 전제로 한 기존 패러다임에서 국가 간 적대관계를 전제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2024년 1월 최고인민회의는 이러한 관계 규정을 보다 구체적인 국가노선으로 발전시킨 계기였다. 김정은은 대한민국을 ‘철두철미의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통일을 더 이상 현실적인 국가목표로 설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남북은 서로 다른 국가이며, 평화통일과 민족공동체를 전제로 한 헌법적·정책적 규정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단계에서 ‘적대적 두 국가관계’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를 넘어 국가정책의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북한은 남북관계의 일시적 변화에 대응하는 정책 조정을 넘어 국가의 목표와 영토, 주권, 적대국의 범위, 통일정책의 존폐를 포괄하는 새로운 국가노선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두 국가론’은 남한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 북한이 스스로를 어떠한 국가로 규정하고 장기적으로 어떠한 질서를 추구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국가전략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북한은 이러한 국가노선을 제도와 조직에 본격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통일과 대남사업을 담당해 온 기구들의 기능이 재편되었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비롯한 기존 통일 관련 기구는 폐지되거나 역할과 기능이 대폭 전환되었다. 민족경제협력과 통일전선사업 관련 조직, 대남 선전 및 정책 전달체계 역시 새로운 국가관계 인식에 맞추어 재정비되었다. 이러한 조직 개편은 단순한 행정적 조정이 아니라 통일을 전제로 운영되어 온 국가기구를 상호 적대적인 국가관계에 부합하도록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은 통일과 민족공조를 담당하던 제도적 기반을 해체하고, 남한을 외부의 적대국으로 관리하는 국가안보 및 대외관계 중심의 체계로 대남정책의 제도적 기반을 전환하였다.
‘두 국가론’은 이후 헌법적 제도화 단계로 발전하였다. 김정은은 여러 차례 북한 헌법을 새로운 남북관계 인식에 부합하도록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그 내용에는 대한민국의 적대국 규정, 통일 관련 조항의 수정 또는 삭제, 북한 영토 개념의 재정립, 남북관계의 국가 간 관계로의 재규정 등이 포함되었다. 이는 ‘두 국가론’이 정책적 선언을 넘어 국가의 기본질서와 정체성을 규정하는 헌법적 차원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2026년 3월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이러한 방향에 부합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통일 관련 조항이 삭제되고 영토조항이 새롭게 정비되었으며,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핵무력 지휘체계도 보다 명확하게 규정되었다. 김정은은 시정연설을 통해 대한민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재차 규정하고, 이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확인하였다. 다만 공개된 헌법에는 ‘제1의 적대국’이나 ‘불변의 주적’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명문화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통일 관련 조항의 삭제와 영토 개념의 재구성은 남북관계에 대한 북한의 인식이 정책 수준을 넘어 국가의 기본질서로 제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제도적 전환과 병행하여 북한은 국가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작업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공식 매체와 정치담론에서는 조국통일, 우리민족끼리, 민족대단결과 같이 남북한 전체를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상정하는 표현이 점차 약화되거나 삭제된 반면, 공화국, 국가주권, 영토, 국경, 국가안전, 핵억제력과 같이 영토적 주권국가와 국가안보를 강조하는 개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담론 변화는 단순한 용어의 교체가 아니라 정치공동체의 중심을 민족에서 국가로 이동시키고, 북한 주민의 정치적 정체성을 조선민족 전체의 구성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독립된 국가의 국민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전략환경의 변화와 ‘두 국가론’의 등장
북한의 ‘두 국가론’은 미국 중심 국제질서의 상대적 약화와 다극화의 진전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등장하였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확대, 북중러 전략협력의 심화, 브릭스(BRICS)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부상을 미국 중심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쇠퇴와 새로운 세력균형의 형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질서 인식은 미국 및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외교적·경제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략적 자신감을 강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과거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대북제재를 완화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남북관계를 전략적 통로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남북대화와 민족공조는 미국의 압박을 완화하고 국제적 고립을 돌파하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북중러 전략협력이 확대되고 미중러 간 전략경쟁이 심화되면서 북한은 한국 및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체제 유지에 필요한 외부적 지원과 외교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남한이 지녔던 전략적 효용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한은 더 이상 북한과 미국 사이를 연결하는 필수적인 중재자나 국제사회 진출의 통로가 아니라, 미국의 동맹전략과 대북압박에 동참하는 행위자로 재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북한은 중국・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을 기반으로 미국과 직접 대치하거나 협상할 수 있는 외교적 여건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남북관계를 민족공동체 내부의 특수관계로 유지해야 할 전략적 필요성도 점차 감소하였다. 물론 국제질서의 변화만으로 ‘두 국가론’의 등장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다극화와 북중러 협력은 어디까지나 북한이 기존의 통일지향적 대남전략을 폐기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폭을 넓혀준 외부적 조건이었다. 북한은 이러한 국제환경의 변화를 핵보유국으로서 독자적 국가노선을 강화하고 남한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규정할 수 있는 기회로 적극 활용하였다.
2018-19년 북한이 추진한 대미 및 대남정책의 실패는 기존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평가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북한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제재 완화, 체제안전 보장,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안보질서의 재편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북한이 기대했던 실질적인 성과는 확보되지 못하였다. 북한의 시각에서 남한은 미국의 대북정책과 비핵화 요구를 변화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전략적 자율성도 보여주지 못하였다. 결국 남북관계의 개선은 제재 완화나 체제안전 보장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남한을 매개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기존 접근법의 효용성에 대한 회의가 확대되었다.
하노이 회담 이후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협상을 연계하던 기존 전략에서 점차 이탈하였다. 남한은 미국과 북한 사이의 전략적 중재자라기보다 미국의 정책을 전달하거나 북한의 대미전략을 제약하는 부차적 행위자로 재평가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남한을 민족 내부의 협력 상대이자 한반도 문제의 공동 당사자로 인정해야 할 필요성을 약화시켰으며, 북한은 남한을 경유한 간접적 대미 접근보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전략협상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체제안전 보장, 제재 완화, 핵문제와 평화체제 등 핵심 의제 역시 남북관계가 아니라 북미관계의 문제로 재구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남한의 중재자 역할과 공동 당사자로서의 위상은 의도적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두 국가론’이라는 새로운 대남전략의 제도적・담론적 표현으로 귀결되었다.
북한 핵무력의 증강과 제도화는 ‘두 국가론’이 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물질적 기반이었다. 북한은 2017년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 핵무력의 법적・제도적 지위를 지속적으로 강화하였으며, 이를 국가방위와 체제안보의 핵심 기반으로 명문화하였다. 동시에 전술핵과 다양한 운반체계를 발전시키면서 핵전력의 실전 운용능력도 지속적으로 고도화하였다. 핵무력의 발전은 북한이 체제생존을 확보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과거에는 남북관계 개선, 민족공조, 북미협상과 국제적 타협이 외부의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완화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핵억제력이 체제생존의 핵심 기반으로 자리 잡으면서 북한은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민족주의적 연대에 의존하지 않고도 체제안보를 독자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핵무력은 통일지향적 대남전략을 폐기하면서도 이를 전략적 후퇴가 아닌 국가역량의 강화로 정당화하는 정치적 자원이 되었다. 핵보유국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독자적인 국가노선과 전략적 자율성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핵무력은 단순한 군사적 배경을 넘어 통일국가 전략을 체제생존 중심의 국가전략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한 물질적・상징적 토대로 기능하였다.
한미동맹의 강화와 남한의 통일정책에 대한 북한의 위협 인식 역시 ‘두 국가론’을 뒷받침한 중요한 배경이었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 미국의 확장억제,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한국의 군사력 증강을 체제생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규정해 왔다. 아울러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정책을 북한 체제의 변화와 붕괴, 궁극적으로는 흡수통일을 지향하는 전략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남한은 더 이상 동일한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이나 통일의 협력 상대가 아니라, 북한 국가의 주권과 사회주의 체제의 존속을 위협하는 가장 직접적인 경쟁국가로 재정의되었다. 결과적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체제안보에 불리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두 국가론’을 정당화하는 핵심 논리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 인식을 외부환경에 대한 직접적・객관적 반영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남한과 한미동맹을 실존적 위협으로 규정하는 과정은 새로운 국가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안보화(securitization) 전략의 성격도 동시에 지닌다. 남한을 체제생존을 위협하는 ‘적대적 타자로 구성’ 할수록 북한은 통일담론의 폐기, 대남기구의 해체, 핵무력 강화, 정보통제와 주민동원을 모두 국가안보 차원의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남한에 대한 위협담론은 ‘두 국가론’을 등장시킨 배경인 동시에, 그 노선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정치적 장치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전략의 전환: 통일국가 전략에서 체제생존 국가전략으로
‘두 국가론’의 가장 근본적인 전략적 목표는 남한 중심의 흡수통일 가능성을 차단하고, 북한을 독립적인 사회주의 핵보유국으로 장기적으로 존속 가능한 국가로 재정립하는 데 있다. 과거 북한의 국가전략에서 통일은 단순한 민족적 과제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정치적 대표성과 혁명적 정당성을 완성하는 궁극적 목표였다. 그러나 남북 간 국력 격차가 구조적으로 확대되면서 통일은 더 이상 체제의 정당성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적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북한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의 존속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요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경제력과 과학기술, 외교적 영향력, 문화적 소프트파워, 재래식 군사력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남한의 우위가 고착화된 상황에서 기존의 통일경쟁을 지속하는 것은 북한에 구조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북한은 남북한을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잠정적 정치단위가 아니라 상호 독립된 두 개의 주권국가로 재규정함으로써, 남한이 주장할 수 있는 통일의 정당성과 정치적 대표성을 원천적으로 부인하려 한다. 이러한 점에서 ‘두 국가론’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이 아니라, 통일 자체를 국가전략의 중심축에서 제거하는 전략적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은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통일국가의 건설보다 현재의 북한 국가를 영속적인 정치공동체로 제도화하고, 그 주권과 체제, 영토와 주민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국가전략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전략의 중심축이 ‘통일’에서 ‘국가생존’으로 이동한 것이다.
북한의 기존 통일담론 역시 이러한 전략환경의 변화 속에서 근본적인 재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냉전기 북한의 통일담론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혁명적 정통성을 전제로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정치적 대표성을 주장하는 이념적 기반이었다. ‘하나의 민족’과 ‘통일’은 북한의 대남 정당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핵심 담론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남한의 상대적 우위가 구조화되면서 이러한 담론의 정치적 기능은 점차 역전되었다. 남북한이 동일한 민족이며 장차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통일담론은 북한 주민들에게 두 체제를 비교할 수 있는 인식적 공간을 제공한다. 남한의 경제적 발전과 생활수준, 문화적 다양성과 사회적 기회는 단순히 외국 사회의 성취가 아니라 동일한 민족이 구현한 대안적 삶의 모델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비교는 북한이 주장해 온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더욱이 외부 정보와 한국 문화콘텐츠의 유입이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민족공동체와 통일의 담론 자체가 주민들의 대남 친밀감을 유지하고 북한 체제의 상대적 열세를 드러내는 담론적 부담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북한 지도부의 입장에서 통일담론은 더 이상 체제정당성을 강화하는 정치적 자산이 아니라, 체제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요인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민족공동체와 통일 중심의 국가서사를 약화시키는 대신, 북한 국가의 독립성과 사회주의 체제의 지속성, 그리고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두 국가론’은 체제안보를 일시적인 정책목표가 아니라 국가제도와 국가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심원리로 제도화하려는 전략적 시도이기도 하다. 북한은 체제생존을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통일 과정에 의존하지 않고, 핵무력과 국가주권, 영토적 경계, 그리고 내부 통치체계를 통해 독자적으로 확보하려 한다. 이러한 전략에서 핵무력은 외부의 군사적 공격을 억제하는 방어적 수단일 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전략적 선택을 제약하는 적극적 정치수단으로도 기능한다.
북한은 핵무력을 활용하여 한미의 군사적 선택지를 제한하고, 확장억제와 연합훈련의 비용을 증대시키며, 비핵화 협상을 핵보유국 사이의 군비통제 또는 위험관리 협상으로 전환하려 한다. 따라서 북한이 추구하는 전략적 자율성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체제를 방어하는 소극적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핵무력을 협상자산으로 활용하여 미국으로부터 체제안전 보장과 핵보유국으로서의 전략적 지위를 인정받고, 남한의 군사적・정치적 행동을 제약하며, 한반도 안보질서에서 북한의 협상력을 확대하려는 적극적 자율성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전략적 전환은 한반도 안보구조에 대한 북한의 인식 변화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북한은 한반도 안보문제의 핵심 대립축을 남북관계가 아니라 북미관계로 재구성하려 한다. 북한의 시각에서 남한은 미국의 동맹국이자 미국의 확장억제와 지역 군사전략을 수행하는 하위 행위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체제안전 보장, 핵문제, 제재, 평화체제와 같은 핵심 현안은 남북 간 협상이 아니라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직접 논의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이러한 점에서 ‘두 국가론’은 남한을 민족 내부의 협력 파트너이자 한반도 문제의 공동 당사자라는 지위에서 배제하는 정치적 효과를 갖는다. 남북관계가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로 규정될 경우 남한은 북핵 문제와 평화체제, 군사적 긴장완화와 통일 문제에 정당하게 관여할 수 있는 행위자가 된다. 그러나 남북을 상호 적대적인 두 국가로 재규정할 경우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동맹국이자 군사적 상대방으로 한정할 수 있으며, 체제안전과 핵지위에 관한 핵심 협상은 미국과 직접 추진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결국 북한은 남한을 국내적으로는 지속적인 적대국으로 부각시키는 한편, 국제정치적으로는 독자적 영향력이 제한된 주변 행위자로 위치시키려 한다. 이는 남한의 전략적 중재 가능성을 차단하고, 한반도 안보질서를 남북관계 중심이 아니라 북미 협상 중심의 구조로 재편하려는 ‘두 국가론’의 전략적 의도를 보여준다.
‘구성적 적’의 형성과 북한 국가정체성의 재구성
북한의 ‘두 국가론’은 남한을 단순히 별개의 국가로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북한 국가정체성의 형성과 유지에 필요한 ‘구성적 타자(constitutive other)’, 혹은 ‘구성적 적(constitutive enemy)’으로 남한을 재구성하려는 정치적 프로젝트이다. 구성주의 관점에서 정치공동체의 정체성은 내부의 공통된 가치와 역사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가는 결국 자신이 누구와 구별되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협적 타자로 규정하는가를 통해 구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북한은 남한을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한미동맹, 체제위협을 상징하는 적대적 타자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을 사회주의와 자주성, 반제국주의, 국가주권을 수호하는 독립국가로 정체화하고 있다. 남한에 대한 적대성은 단순한 외교적 태도가 아니라 북한 국가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셈이다.
남한이 북한의 국가정체성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완전히 이질적인 외국이 아니라 역사와 언어, 문화와 민족적 기억을 상당 부분 공유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유사성이 오히려 북한에게는 가장 큰 위협으로 작용한다. 정치체제와 경제질서, 생활수준과 가치체계는 크게 다르지만, 동일한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남한을 자신의 현실과 가장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대안적 사회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북한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국경을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한과 공유해 온 민족적 친밀성과 심리적 연속성을 해체하고, 주민들의 인식 속에서 남한을 동일한 공동체가 아닌 외부의 적대국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결국 남한의 타자화는 제도적 분리를 넘어 기억과 정서, 문화적 소속감까지 재편하려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한의 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정책은 ‘두 국가론’의 핵심적인 국내정치적 기능을 보여준다. 한국의 영상물과 대중문화는 언어와 생활문화의 유사성으로 인해 다른 외국 문화보다 훨씬 높은 접근성과 친밀성을 갖는다. 북한은 이러한 문화적 접촉이 주민들로 하여금 남한의 생활수준과 사회제도, 문화적 다양성을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도록 만든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남한의 정보와 문화는 단순한 외래문화가 아니라 체제안보를 위협하는 정치적 변수로 해석된다. 이러한 비교 가능성은 북한 주민들의 대남 적대의식을 약화시키고,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국가가 요구하는 경제적 희생, 군사적 동원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확대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은 남한의 문화적 영향력을 군사적 위협과 마찬가지로 체제의 이념적 통합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규정한다. 남한을 적대국가로 재규정하는 순간, 남한 문화와 정보의 유입은 더 이상 민족 내부의 교류가 아니라 적대국의 사상적·문화적 침투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보통제와 사상교육, 문화적 처벌과 주민감시는 국가안보와 체제수호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결국 ‘두 국가론’은 주민들의 인식 속에 새로운 적대의 경계를 내면화하고 남북한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확대하는 내부 통치전략으로 기능한다.
남한의 적대국가화는 북한 내부의 정치적 결속과 지속적인 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통치자원이기도 하다. 외부의 실존적 위협이 존재한다는 담론은 주민들에게 국가와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요구하며, 경제난과 군사비 증대, 사회적 통제 역시 체제수호를 위한 불가피한 비용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핵무력 증강과 재래식 군사력의 현대화, 국방 부문에 대한 자원의 우선 배분과 주민동원은 평시의 정책선택이 아니라 적대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비상적 조치로 정당화된다. 나아가 체제 비판이나 외부 정보에 대한 관심도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적대세력의 침투와 연계된 안보문제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남한은 북한이 제거해야 할 일회성 적이 아니라, 국가정체성과 체제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구성적 적(constitutive enemy)으로 기능한다. 북한은 남한의 위협을 반복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주권, 그리고 김정은 지도체계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남한의 적대국가화는 북한의 핵전략에도 중요한 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기존의 통일지향적 민족주의 아래에서 남한은 동일한 민족이자 장차 통합해야 할 공동체의 일부였다. 이러한 상대를 핵무기로 위협하거나 실제 핵공격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것은 민족해방과 자주통일, 민족공조라는 기존 담론과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한을 별개의 적대국가로 재규정할 경우, 대남 핵위협과 핵사용 가능성은 더 이상 동족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적대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 국가의 자위권 행사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 국가론’은 핵억제와 핵사용 교리가 직면하는 민족적・도덕적 제약을 제거하는 담론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단순히 핵억제의 명분을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술핵과 단거리 운반체계의 발전, 핵사용 조건의 확대, 작전적 운용체계의 구축은 남한을 유사시 실제 핵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군사적 대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결국 남한의 적대국가화는 북한 핵전략을 국가정체성과 체제안보 논리 속에서 일관되게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정치적 기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과의 동족관계를 부정한다고 해서 민족주의 자체를 폐기한 것은 아니다. 북한은 남북한 주민을 서로 다른 민족으로 규정하는 명시적인 ‘두 민족론’을 채택하기보다, 남한과의 동족관계만을 선택적으로 부정하는 제한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조총련을 비롯한 재외동포 정책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만약 북한이 조선민족의 역사적·문화적 통일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경우, 해외동포들이 북한을 조국으로 인식하며 유지해 온 정치적·문화적 정체성의 기반 역시 약화될 수 있다. 또한 재외동포 사회가 제공해 온 정치적 지지와 경제적·외교적 자산 역시 상당 부분 상실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북한은 민족주의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국가전략의 필요에 따라 적용 범위를 선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남한과 남한 주민은 민족공동체의 실질적 범위에서 배제하는 반면, 재외동포는 여전히 북한과 역사적·문화적 연계를 공유하는 구성원으로 포섭한다. 이는 보편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체제안보와 국가이익에 따라 포섭과 배제의 대상을 달리하는 선택적 민족주의(selective nationalism)로 이해할 수 있다.
남북관계의 재구조화와 적대적 공존질서의 제도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를 일반적인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관계 규정은 남북한이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동일한 민족공동체에 속하며, 분단은 궁극적으로 통일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과도적 상태라는 전제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두 국가론’은 이러한 특수관계의 규범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북한은 남북한을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잠정적 정치단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주권과 영토, 국가정체성을 가진 독립된 국가로 재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분단 역시 통일을 통해 해소되어야 할 일시적 현실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속될 국가관계의 기본 질서로 새롭게 위치 지워진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정치적 선언에 머물지 않는다. 북한은 통일 관련 기구와 대남기구를 해체하거나 기능을 축소하고, 통일과 민족공동체를 상징해 온 개념들을 공식 담론과 국가제도에서 단계적으로 제거하고 있다. 동시에 국가주권이 미치는 영토와 국민의 범위를 보다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질서를 헌법과 법률, 국가기구와 영토 개념 속에 제도화하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국가론’은 남북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국가제도 전반에 내재화하려는 국가 재구성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지향하는 두 국가관계는 일반적인 국가 간 외교관계나 상호 승인과 협력을 전제로 하는 평화공존과도 구별된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정전체제 아래에서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적대적 교전국 관계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에서는 군사적 긴장과 상호 위협이 일시적인 예외가 아니라 관계를 구성하는 정상적 상태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이 구축하려는 새로운 관계질서는 ‘적대적 공존(adversarial coexistence)’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이는 남북한이 각각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정치적·군사적 적대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핵억제와 군사적 균형을 통해 전면전만을 억제하는 질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평화는 상호 신뢰와 화해의 산물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억제의 논리에 의해 유지된다.
이러한 관계질서는 냉전기 동서독 관계와도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동서독은 체제경쟁과 정치적 대립을 지속하면서도 [기본조약]을 통해 상호 존재를 인정하고, 교류와 협력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반면 북한은 통일담론 자체를 폐기하는 동시에 군사적 적대성과 핵억제를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핵심 원리로 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지향하는 것은 협력적 평화공존이 아니라 적대성을 전제로 이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장기적 공존체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두 국가론’의 제도화는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의 공간을 축소하는 동시에, 그 자리를 차단과 경계의 질서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기존의 대남 및 통일기구를 해체하고 남북 연결망을 차단하는 조치는 단순한 행정조직의 개편이 아니라, 남북관계를 교류가 가능한 특수관계에서 국경을 사이에 둔 국가 간 관계로 전환하려는 정책적 표현이다. 북한은 남북 사이의 경계를 군사분계선이라는 물리적 차원에 한정하지 않고 정치적・제도적・사회적・심리적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사람과 정보, 문화와 기억의 이동을 통제함으로써 남북 사회의 상호작용을 최소화하고, 양 체제의 분리를 구조적으로 고착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화(boundary making)는 북한의 국가정체성 재구성과도 직결된다. 북한 주민들이 자신을 한반도 전체를 구성하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독립국가의 국민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남한과의 일상적・문화적 연계가 지속적으로 약화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남한 주민 역시 같은 민족의 구성원이 아니라 적대국의 국민으로 재인식되어야 한다. 따라서 물리적 차단은 단순한 국경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정체성과 소속의 경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정치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두 국가론’은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협력체제에서 군사적 긴장을 관리하는 적대적 공존체제로 전환시키려는 전략이다. 이러한 질서에서는 남북합의의 목적 역시 공동체 형성이나 관계 개선보다 우발적 충돌과 군사적 위기를 관리하는 데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대화와 협력도 관계의 정상적인 운영원리가 아니라, 위기관리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제한적으로 활용되는 전술적 수단으로 성격이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국가론’과 한반도 질서의 구조적 전환
북한의 ‘두 국가론’은 [남북기본합의서], [6·15 남북공동선언], [10·4 남북정상선언], [판문점선언] 등 기존 남북합의를 지탱해 온 규범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킨다. 이들 합의는 남북한이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에 있다는 공통된 인식을 전제로 성립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전제를 부정하는 순간, 기존 합의는 형식적으로 존속하더라도 정치적 정당성과 실질적 구속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통일과 민족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장기적 목표가 사라질 경우, 남북대화와 교류협력을 지속해야 할 규범적 동력 역시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협력은 더 이상 공동체 회복을 위한 상호 의무가 아니라, 적대적 국가 간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루어지는 제한적 거래로 성격이 변화한다. 그 결과 남북관계의 제도적 연속성은 약화되고, 합의의 지속 여부는 정권교체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더욱 크게 영향을 받는 불안정한 구조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남북관계가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에서 국가 간 안보관계로 전환될수록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 국제정치와 강대국 경쟁구조 속으로 더욱 깊이 편입된다. 북한은 중국・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한국은 미국・일본과의 안보협력을 확대함으로써 한반도 정세는 북중러와 한미일이라는 두 전략적 연대가 경쟁하는 지역질서와 긴밀하게 연계된다. 북핵 문제 역시 남북관계의 범주를 넘어 미국의 확장억제, 중국과 러시아의 대미전략, 미중・미러 전략경쟁과 결합된 국제안보 의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남북한이 독자적으로 긴장을 완화하거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전략적 자율성이 제약된다. 남북관계의 변화가 양측의 정치적 의지보다 동맹체제와 강대국 전략, 국제제재 체제의 영향을 더욱 직접적으로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두 국가론’은 한반도 문제를 脫민족화(de-nationalization)하는 동시에 국제정치화(internationalization)하는 효과를 갖는다. 남북관계는 민족 내부의 통합 과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전략적 연대에 속한 국가들 사이의 안보경쟁으로 재구성되며, 한반도는 독자적 정치공간이라기보다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가 교차하는 지정학적 공간으로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두 국가론’이 정착될 경우 한반도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원리는 상호 신뢰가 아니라 핵억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핵무력을 통해 체제생존을 보장하고 한국과 미국의 전략적 선택을 제약하려 하며, 한국과 미국은 확장억제와 미사일방어체계, 전략자산 전개, 연합방위태세를 강화함으로써 이에 대응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전형적인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북한은 핵무력 강화를 방어적 조치로 주장하지만 한국과 미국은 이를 공격능력의 증대로 인식하며, 반대로 한미의 군사력 증강은 북한에게 선제공격과 체제전복 가능성의 확대를 의미한다. 결국 자신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취한 조치가 상대방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이는 다시 추가적인 군비증강으로 이어지는 자기강화적 악순환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안보 딜레마는 핵탄두와 운반체계뿐 아니라 미사일방어, 정밀타격 능력, 조기경보체계와 지휘통제, 사이버전과 우주전, 무인체계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핵억제는 전면전의 가능성을 일정 부분 억제하는 안정성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 안정성은 상호 신뢰가 아니라 위협과 공포의 균형에 기초한다. 따라서 오판과 의사소통의 실패, 군사기술의 급속한 변화, 위기 상황에서의 선제적 대응 압력이 결합될 경우 억제체제의 안정성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구조적 한계를 내포한다.
무엇보다 ‘두 국가론’이 장기적으로 제도화될 경우 남북 간 적대성은 특정 정부의 정책이나 일시적인 군사적 위기에서 비롯되는 현상이 아니라, 국가제도와 국가정체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적 질서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남한의 위협을 핵무력 강화와 주민동원, 사회통제와 체제결속의 정당화 근거로 활용하고, 한국 역시 북한의 핵위협을 한미동맹의 강화와 확장억제, 군사력 증강을 정당화하는 핵심 논리로 활용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양측은 상대방의 위협을 자신의 안보정책과 국가제도를 유지・강화하는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며, 이러한 상호작용은 적대성을 스스로 재생산하는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군사훈련과 무력시위, 미사일 시험발사와 전략자산 전개, 제재와 대응조치가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남북관계를 구성하는 일상적 조건으로 자리 잡는다. 상대방의 모든 행동은 적대적 의도의 표현으로 해석되고, 대화와 합의 역시 관계 개선의 출발점이라기보다 위기관리나 전술적 필요에 따른 일시적 수단으로 이해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적대성의 제도화는 남북한 주민들의 정체성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북한 주민에게 남한은 더 이상 같은 민족이 아니라 체제를 위협하는 적대국으로 사회화되고, 한국 사회에서도 북한은 통일과 대화의 상대보다 핵무기를 보유한 직접적 안보위협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상호 인식이 세대를 거쳐 반복적으로 재생산될 경우, 평화와 통일을 지지하는 사회적 기반은 점차 약화되고, 적대적 공존질서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정상 상태(new normal)로 고착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글쓴이 차문석> 국립통일교육원 교수를 거쳐 지금은 서울사이버대 통일안보북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국제관계학과 북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 저서> 『북한의 사회변동과 혼종성: 유동하는 경계들』(동국대출판부, 2025)『평양의 도시정치와 공간구조』(통일연구원, 2024) <최근 논문> 한반도 문제와 ‘핀란드화’ 어젠다 분석, 『경계연구』(2024), 미중의 글로벌 전략과 동북아 지정학의 귀환, 『국가전략』(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