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관술의 3가지 감춰진 진실

어느 독립운동가의 죽음

“조선민족 만세!”

“탕! 탕!”

어느 날, 투옥 중이던 한 명의 독립운동가가 갑작스럽게 산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살 직전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조선민족 만세!”라고 당당히 외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수감 기간 내내 지사(志士)의 면모를 보였던 무기징역형의 모범수였으며, 당시 사형당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는 엄혹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끝까지 맞서 싸웠던 불굴의 독립투사였다. 일제 경찰에게 수차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탈출과 변장으로 신출귀몰하게 일제 경찰을 농락하며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고되고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던 영웅이었다.

그런데 이 불굴의 독립운동가를 야산으로 끌고 가 살해한 주체는 일제의 군대와 경찰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의 군대와 경찰이었고 그 배후에는 미군이 있었다.

이 비운의 독립투사의 이름은 바로 ‘이관술(李觀述)’이다. 일제 경찰도 어쩌지 못했던 그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해방된 조국에서 한국인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한국인 검사에게 심문을 받고 한국인 판사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받아 한국인 형무관들이 관리하는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끝내 한국 군인과 경찰들의 손에 끌려가 영문도 모른 채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이런 치욕과 불명예를 당하느니 차라리 일제강점기에 일본 경찰의 손에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독립투사 이관술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해방된 조국에서 무기징역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가야 했으며, 결국 한국인들의 총탄에 쓰러져야만 했을까?

감춰진 3가지 진실

해방된 조국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비운의 독립운동가 이관술.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사회는 그에 관한 세 가지 진실을 철저히 은폐해 왔다.

첫째, 이관술은 일제에 맞서 모든 것을 바쳐 끝까지 싸운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진실.
둘째, 이관술은 해방정국 최대의 범죄로 알려진 정판사 위폐 사건의 주범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 사건은 조작 사건이었다는 진실.
셋째, 이관술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골령골에서 총살당한 것은 명백한 불법 학살이었다는 진실.
이 세 가지 감춰진 진실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감춰진 진실 1] 위대한 독립투사, 이관술의 헌신

이관술은 울산의 명문 양반가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일본인조차 입학하기 힘들었던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다녀온, 당대 최고 수준의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귀국 후 동덕여고보 지리 및 역사 교사로 부임한 그는 얼마든지 유복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시위에 나선 제자들이 일제 경찰에 끌려가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참상을 목격하며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그는 비겁하게 뒤로 물러서 있는 지식인 사회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미련 없이 던져버린 채 험난한 항일 독립운동의 길에 투신했다.

그의 독립 투쟁은 끈질기고 치열했다. 1930년대부터 반제동맹, 경성콤그룹 등을 이끌며 노동자, 농민 등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일제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반제동맹 활동 중 체포되어 안정적인 교사직을 그만두게 되고 잔혹한 일제 경찰의 고문을 받았음에도 변절하기는커녕 석방되자마자 바로 동지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때로는 허름한 옷차림의 농부로 변장하여 일제경찰을 속여가며 항일투쟁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후 또다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으며, 심한 폐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마지막 날 도주하여 구두수선공이나 땜장이, 넝마주이 등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전국을 무대로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해방을 맞을 때까지 외롭고 고된 지하 투쟁을 이어갔다.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처절한 투쟁의 과정 속에서 빛났던 그의 따뜻하고 청렴한 인품이다. 험난한 피신 생활 중에도 곤란에 처한 동지를 보면 입고 있던 옷을 기꺼이 벗어주고 지갑을 통째로 털어 주었으며, 이웃이 굶주리면 자신의 밥을 내어주고 본인은 굶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오직 조국의 독립과 동포를 위해 자신의 지위와 부는 물론, 개인적인 안위마저 철저히 희생했던 그의 일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그 자체였다.

[감춰진 진실 2] 해방정국 최대의 조작극,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해방 직후 이관술은 대중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신망을 받는 유력한 국가 지도자였다. 1945년 10월 ‘선구회’가 105개 단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관술은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조선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 5위(12%)에 올랐다. 또한 정부 내각 조직 시 ‘경제부장’ 후보로 2위에 오를 만큼 그의 명망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절대적인 대중의 지지는 오히려 그를 비극적인 운명으로 몰아넣는 덫이 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일제의 통화 남발을 방조하고 미곡 자유화 등 경제 정책에 크게 실패하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민중의 분노에 직면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946년 5월 초, 뚝섬에서 대규모 위조지폐를 찍어낸 일당이 검거되었는데, 사건의 핵심 주모자가 이승만과 김구가 이끄는 대표적 우익 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뚝섬지부 조직부장 이원재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자신들의 정책 실패로 정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파트너로 삼으려던 우익 단체의 치명적인 범죄까지 터지자, 미군정은 이 위기를 은폐하기 위한 조작극을 기획했다. 우익의 범죄를 덮고 민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눈엣가시였던 제1야당 조선공산당과 당의 최고위급 간부이자 유력한 민족의 지도자인 이관술을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다.

미군정은 공산당 간부들이 당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관지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에서 막대한 위조지폐를 찍어내어 국가 경제를 교란시켰다는 충격적인 가짜 뉴스를 유포했다. 사법 정의는 철저히 유린당했다. 정판사에서 위폐를 인쇄했다는 징크판이나 위조지폐 실물 등 물적 증거는 단 한 장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직 경찰의 혹독한 물고문과 구타에 의해 강요된 피의자들의 허위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심지어 재판부는 핵심 피의자의 완벽한 알리바이가 입증되자 무죄를 선고하는 대신, 공소장에 명시된 범행 모의 시기를 ‘10월 하순’에서 ‘10월 중순’으로 슬그머니 앞당겨 판결문을 조작하는 사법 범죄까지 저질렀다. 이관술은 이 암흑 재판 과정에서 다른 피고인들과 분리되어 불리한 심리를 받아야 했고, 고문으로 날조된 조서들에 맞서 결백을 주장했으나 철저히 묵살당했다. 결국 대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독립투사는 하루아침에 국가 경제를 파괴한 파렴치한 범죄자 집단의 수괴로 낙인찍힌 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해방정국 최대의 조작극이 낳은 참담한 결과였다.

[감춰진 진실 3] 골령골의 비극, 불법적인 처형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울형무소(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관술은 1947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조작된 사건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는 결코 자신의 굳은 신념을 잃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도 늘 책을 가까이하며 배움을 사모했고, 자신의 재산(땅)을 기부하여 고향 울산에 반곡초등학교가 설립되는 데 기여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보다도 아이들의 교육과 공동체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던 그의 헌신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1950년 6·25 한국전쟁의 발발은 그의 운명을 비극적인 최후로 내몰았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경부터 7월 17일까지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최소 1,800여 명을 충남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현 대전시 동구 낭월동)로 끌고 가 집단 처형했다. 단지 인민군이 남하하면 북한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자행된 무참한 학살이었다. 이관술 역시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8일 만인 7월 3일, 이 끔찍한 학살의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일제의 그 어떤 가혹한 고문과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독립투사는 결국 해방된 조국의 야만적인 국가 폭력에 의해 자유와 명예는 물론 생명마저 억울하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드러나는 3가지 진실

영원히 묻힐 것 같았던 이 뼈아픈 세 가지 진실은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역사의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은 과거의 비극이 켜켜이 쌓여온 시간의 순서와는 정반대인 ‘역순’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나중에 벌어진 비극인 골령골 불법 처형의 진실(3)이 60년 만에 국가 기구를 통해 가장 먼저 밝혀졌고, 이어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실(2)이 79년 만에 사법부의 재심 무죄 판결을 통해 두 번째로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는 가장 본질적인 진실(1)을 서훈을 통해 온전히 회복하는 일이 우리 앞에 마지막 과제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역사의 지층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한 꺼풀씩 벗겨지는 이 진실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드러나는 진실 3] 60년 만에 밝혀진 불법 처형

골령골에서 자행된 참혹한 학살 직후 형무소 측은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한 혼란이 겹치면서 이관술의 생사 여부와 행방은 오랜 세월 동안 철저히 은폐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비로소 그 억울한 죽음의 전말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관술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지기까지 무려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려야 했던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끔찍한 집단 학살의 직접적인 가해 주체는 충남지구 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및 대전지역 경찰이었다. 또한 보고서는 계엄령 선포 이후 이들 기관이 계엄사령부의 지휘와 명령을 받았으므로, 본 사건의 최종적인 책임은 지휘·명령 계통상 최고결정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명백히 결론지었다.

이러한 국가 차원의 진실 규명을 근거로 이관술의 유족들은 2012년 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상고심 최종 판결에서 피고인 대한민국 측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에서의 유족(원고) 측 승소를 확정지었다. 이 대법원 판결을 통해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독립운동가가 국가 권력의 불법적인 처형 명령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했다는 참담한 진실이 법적으로 증명되었다. 해방된 조국이 독립투사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불법적인 권력을 동원해 그의 생명마저 무참히 앗아갔음을 국가 기관 스스로 공식 인정하고 확정한 것이다.

[드러나는 진실 2] 79년 만의 정판사 사건 재심 무죄 판결

골령골의 억울한 죽음이 대법원을 통해 불법적인 국가 폭력으로 인정받은 데 이어, 마침내 그가 짊어져야 했던 범죄의 굴레도 벗겨졌다. 2025년 12월, 대한민국 사법부가 이관술에 대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1946년 11월 1심 재판에서 유죄와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지 무려 79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특별히 재심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검찰이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엄격한 증거재판주의 원칙과 법리에 따라 스스로 무죄를 구형하는 책임 있는 태도를 보였으며, 재판부 역시 법과 양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하는 결단을 내렸다는 점이다. 이 판결을 통해, 마침내 이관술은 자신을 짓누르던 ‘위조지폐범’이라는 지독한 낙인을 79년 만에 완전히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이 무죄 선고는 단순히 1946년에 발생한 일개 형사 사건 재판 하나를 뒤늦게 바로잡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해방 직후 국가 권력이 정치적 목적 아래 행정, 군대, 경찰, 사법 기구를 총동원하여 허구의 범죄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역사적 과오를 대한민국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다시 끼운 중대한 역사적 판결이다. 즉, 단지 이관술 개인의 억울함을 푼 차원을 넘어 정판사 ‘위폐’ 사건 자체가 정치적으로 기획된 거대한 조작극이었음을 국가가 사실상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드러나는 진실 1] 독립유공자 서훈

79년 만의 재심 무죄 판결로 이관술에게 덧씌워졌던 ‘위조지폐범’이라는 억울한 낙인은 마침내 사법적으로 완전히 벗겨졌으나, 그에게는 아직 넘어야 할 뼈아픈 현실이 남아있다. 바로 ‘공산주의자’라는 이념적 주홍글씨다.

실제로 1992년 문민정부 출범 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있자, 이에 고무된 유족들은 1996년 4월 고향인 울산 선바위 유원지 인근에 ‘우국지사 학암 이관술 유적비’를 세우고 그의 항일 행적을 기리고자 했다. 그러나 건국회와 재향군인회 등 울산 지역 10여 개 반공 보수단체들의 반발 및 강제 철거 협박과 더불어 경찰, 안기부의 부당한 압력까지 이어졌다. 결국 유족들은 비석을 세운 지 불과 1년여 만인 1997년 8월, 비석을 스스로 철거하여 땅속에 파묻어야만 하는 비참한 촌극을 겪어야 했다.

이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이념적 대립이 우리 사회를 사상적, 정신적으로 얼마나 경직시키고 퇴행시켰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 이후 남쪽에서는 국가보안법과 반공주의가 도그마로 작용하면서, 우익 혹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만을 인정하는 편협한 시각이 독소처럼 퍼져나갔고 결국 어둠 속에 빛나던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는 반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법부마저 이관술의 무죄를 선고,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독립운동가의 명예를 선양해야 할 국가보훈부는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이관술의 서훈을 보류했다. 만약 단지 사회주의 계열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항일 투사에게 국가유공자 서훈하는 것을 주저한다면, 이는 국가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또다시 방기하는 셈이다.

이관술의 서훈은 왜 시급한가?

이관술의 딸은 아버지가 존경받아 마땅한 독립운동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위조지폐범’과 ‘빨갱이’의 딸이라는 멍에를 쓴 채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 딸은 아흔 살이 넘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고,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애써온 손녀조차 예순 살이 넘었다. 이분들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국가는 하루라도 빨리 이관술을 독립유공자로 온전히 인정하고 서훈해야 마땅하다. 이는 그동안 국가가 저지른 끔찍한 폭력과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유족들의 깊은 상처를 씻어주는 최소한의 도리이다. 그래야만 다시는 우리 사회에서 이념의 잣대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함부로 비난하고 핍박하는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관술의 서훈과 명예 회복은 단지 훌륭한 독립운동가 한 명을 기념하거나, 억울한 국가 폭력 피해자 한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 현대사에는 이관술처럼 조국을 위해 헌신을 하고도 이념의 굴레에 씌워져 역사에서 잊히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그리고 그로 인해 핍박받으며 고통스럽게 살아온 후손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그분들은 이관술보다 덜 유명하다는 이유로 뉴스의 조명조차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학술 연구나 재심 신청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여전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다. 그런 점에서 이관술의 사례가 제대로 해결되고 온전한 복권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쓰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반쪽짜리였던 역사를 제대로 다시 쓰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글쓴이 임성욱> 역사를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결에 관심이 많음.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신서원, 2019)를 집필함.